한국원자력환경공단

본사주소. [38062]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천길 19 (서악동) 대표전화. 054-750-4114

COPYRIGHT ⓒ KORAD. ALL RIGHT RESERVED.

  • 블로그
  • 페이스북
  • 인스타그램
  • 유튜브

Build Up Future

컬럼

방폐물의 시계

청정누리 음성으로 듣기

정재학
한국방사성폐기물학 회장 /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 교수

(가상) 고준위특별법 자동 폐기 후 10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오늘은 2034년 3월 1일, 제23대 국회 임기 만료가 채 3개월도 남지 않았다. 2031년 정부가 수립한 「제4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의 내용을 반영한 특별법안이 6건이나 발의되었지만,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쟁점 하나를 줄이지 못해 자동 폐기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지난 제20대 국회부터 벌써 네 번째다. 언론에서는 국회가 특별법을 발의하고 스스로 폐기하는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며 연일 날 선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다음 달로 다가온 총선 준비로 지금 국회에선 아무도 이 법안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이번에 또 자동 폐기되면 정말 유권자인 국민을 뵐 면목이 없다며 특별법 통과를 눈물로 호소하는 법안 대표 발의자 여섯 분의 국회의원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 2024년 5월 제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4건의 고준위 법안이 폐기되고 난 후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처음엔 연이은 특별법 자동 폐기에 실망한 전문가들이 참여를 고사하는 바람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결국 2025년 「再再검토 위원회」가 설치되어 세 번째 공론화가 진행됐고, 2026년 「제3차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발표됐다, 사업 목표 시점만 5년 뒤로 밀렸을뿐 저장과 영구처분으로 이어지는 기술적인 내용은 제1차 및 제2차 기본계획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고, 또 세금을 낭비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아무튼 2027년 여야를 아울러 5건의 특별법이 다시 발의되었다. 이번에야말로 특별법 제정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중간저장시설 용량을 정하는 문제가 또 발목을 잡아 2029년 5월 제22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5건의 특별법안은 또다시 폐기되었다.

특별법 제정이 계속 무산되는 가운데, 저장시설 용량의 포화를 앞둔 ‘○○원전’, ‘××원전’에선 불가피하게 기존 「원자력안전법」에 따른 ‘운영변경허가’를 통한 저장용량 확충이 추진되었다. ‘○○원전’에선 주민과 원전 운영자 사이에 어렵게 협의가 이루어져 포화를 1년 앞두고 부지내 저장시설을 겨우 설치할 수 있었다. 반면, ‘××원전’에서는 저장용량 확충과 지역 지원사업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국 지난 2030년 원전 5기의 가동이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오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발전원 부족에 따른 제한송전과 빈번한 불시정전 사태를 경험하고 나서야 극적인 타협을 통해 1년 후 ‘××원전’의 가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전’에선 주민의 반대로 부지내 저장시설 추가설치가 계속 지연되고 있고, 이대로 가면 어느 날 갑자기 원전 7기의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이 미디어를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부지내 저장시설 확충에 따른 주민의견수렴 및 지역지원을 위한 명확한 원칙과 절차 부재가 근본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국내외 언론에선 소중한 국가자산이자 공공재(公共財)인 원전이 고준위방폐물 저장 문제로 멈춰서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대만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또 벌어졌다며 입법을 미뤄온 국회를 비판하는 기사가 쏟아졌지만, 그 피해를 국민이 다 떠안고 난 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원전 주변 지자체와 주민은 고준위방폐물 저장의 한시성(限時性) 보장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정부는 관리시설(중간저장시설과 영구처분시설) 부지선정을 위한 사전 준비의 하나로 부적합 지역을 배제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몇몇 지역이 검토대상에 포함되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해당 지역 주민과 지자체는 일제히 반발했다. 수많은 주민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지자체 행정은 마비되었다. 국무총리와 장관이 나서 주민의 동의 없이는 문헌자료 검토 등 부적합지역 배제를 위한 어떠한 작업도 하지 않을 것임을 여러 번 약속한 후에야 1년여에 걸친 갈등은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지금도 주민이 시위에 나섰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원전이 정말 멈춰 설 수 있고 또 전기공급이 실제로 끊길 수 있다는데 모두 놀랐다. 더욱이 1990년 안면도, 1994년 굴업도, 2003년 부안에서 아프게 경험했던 극심한 사회적 갈등이 미리 예견되었음에도 입법부가 반복된 입법 부작위로 이를 방관했다는 사실이 온 국민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2031년 정부는 연인원 1만 명에 달하는 국민참여단과 「再再再검토 위원회」를 통해 고준위방폐물 관리방안에 대한 논의를 다시 추진했다. 언론은 벌써 네 번째 공론화(空論化)라며 결실 없이 같은 일에 자꾸 세금을 투입하는 문제를 지적했지만, 네 번째 공론화 건의문 어디에도 지난 세 번의 공론화 때와 유의미하게 달라진 부분을 찾아볼 순 없었다. 2032년 그렇게 또 「제4차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이 수립되었고 국회에서는 또 특별법안 6건이 발의되었다. 출발은 정말 좋았다. 이미 오랜 논의를 거쳐 더할 나위 없이 정선된 법안이었고 최초 상임위에 상정된 날 고준위방폐물 처분시설 용량을 제외한 쟁점은 없었다. 그런데 그 하나의 쟁점이 마지막까지 남아 또 특별법 통과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순간 ‘펑’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연구실 전등이 모두 꺼지고 암흑이 찾아왔다. 4년 전 ‘××원전’ 가동 중단 때 일주일에 한두 번 경험했던 불시정전의 악몽이 떠 올라 식은땀이 났고, 이내 갑자기 주변이 다시 밝아지며 눈이 번쩍 떠졌다. 여기는 어젯밤 잠들었던 침대 위, 시계는 2024년 3월 1일 아침을 알리고 있다. ‘아직 제21대 국회 임기 만료가 3개월이나 남아있지!’ 순간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再再검토 위원회」나 「再再再검토 위원회」도, 원전의 가동 중단이나 제한송전도, 부지내 저장시설 확충이나 관리시설 부지선정을 둘러싼 안타까운 사회적 갈등도 모두 꿈속의 일이었다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젠 가망이 없다고 자포자기했던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고, 제21대 국회 임기 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러 다시 한번 나서야겠다. 꿈속에 보았던 그 끔찍한 경험을 그 끔찍한 비효율을 그냥 두고만 볼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