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사랑하는 남자 하나를 안다. 여름 한 계절을 좋아하고 여름 한 계절을 사랑하고 유독 여름 한 계절에 흥분하며 찬양하는 남자 하나를 안다. 그는 봄꽃이 지는 때를 시작하여 잎새들이 병아리 눈물만큼에서 닭의 벼슬처럼 커지는 시기 까지 드디어 잎새들이 어른 손바닥처럼 실한 녹음으로 너울거리는 한 여름까지를 살맛나는 표정으로 사는 남자이다. 여름의 흐드러진 나무를, 여름의 부드러운 바람을, 여름의 신선한 새벽을,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을, 무성한 여름 산을, 그리고 여름 하늘이 손에 잡힐 것 같은 별을 사랑하며, 여름새를, 여름의 꽃을 모두 사랑하고 있는 남자였다. 그의 여름 사랑은 막연한 것이 아니었다. 여름별의 별자리와 이름을, 여름새의 철새와 텃새들 의 이름과 그들의 생리를, 또 여름 꽃들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피 어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름에 관한한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 그는 여름 식물학자이자 여름 조류학자며, 여름 기후 의 변화를 예감하는 관상학자이자 여름하늘을 측량하는 천체에 능한 박사이기도 하다. 여름 에 그의 피는 펄펄 끓는다. 여름에 그의 눈빛은 빛나고 여름에 그의 몸의 근육들은 눈부시게 생성하여 불끈불끈 일어서는 힘이 든든해 보이고 그의 발걸음은 한걸음에 큰 산을 넘을 것만 도 같다. 여름 느티나무를 보면 안다. 저것을 소나무라고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걷다가 바라보는 멋지게 휘늘어진 소나무를 보면 그 남자와 많이 닮아있다. 든든하고 그늘의 품이 넓고 우리나라 역사를 재미있게 감칠맛 나게 풀어 놓는 그의 질펀한 입담과 같은 생각 이 든다. 그의 몸은 크지 않다. 그의 키는 아무래도 좀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성큼 산을 오르는 그
남자를 보면 산이 바로 그 남자요, 그 남자가 바 로 산인 것 만 같다. 여름 산을 생각해 보라. 어 디에도 빈 곳 없이 아기자기 무성무성 하게 나무 와 풀과 열매가 있다. 그뿐인가. 산새들이 노래를 하고 산속 깊은 계곡에선 시원한 물줄기를 어느 신의 휘파람처럼 상큼하게 풀어 내리고 있다. 그는 여름 산과 같이 이야기가 많다. 어느 풀줄기 를 하나 뽑아도 그는 그 약초의 원명과 뿌리의 효 과까지 잘 안다. 그는 약초같이 그 말과 웃음으로 아픈 몸을 풀어 주는 약초가 된다. 그는 여름 그 어디에 있거나 소설가가 되고 시인이 되고 가수 가 되고 역사가가 되고 철학자가 되며 때때로 신 비한 명상에 든 스님 같은 표정을 볼 때가 있다.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남자와 산을 오르 고 있었다. 그 남자의 뒤를 따르는 나는 걷고 있 다기 보다 날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산 이 친숙하지도 않은 지극히 초보의 입장에서 그 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산이 마치 내 작은 귀여운 조카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만만했다.
쉽고 편안하게 그렇게 나는 산을 올랐다. 갑자기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허리를 굽히고 무엇 인가 풀을 만지는 듯하다가 그는 내 앞으로 돌아섰다. “잘 어울릴 것 같아.” 그것은 손끝이 떨리도록 고운 노을빛 산나리 한 송이었다. 산나리 한 송이를 받아들고 나는 그 산 전체를 통으로 받는 기분이었다. 그 산에는 그 남자도 있었다. 그 남자를 한 송이 산나 리로 압축해 받는 그런 황홀을 나는 분명 느꼈다. 조금 더 가다가 그 남자는 다시 허리를 굽 혔다. 그의 손에는 빛깔도 유혹적인 빨강 산딸기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세 개를 내 입에 넣 어주었다. 두 개를 그 남자의 입에 넣었다. “독이 있을지도 몰라.” 그 남자가 장난기 있게 웃었다. 그래 좋지. 독이 있어 죽는다 해도 나는 그 산딸기를 먹었을 것이다. 나누어 먹은 다섯 개의 독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다 해도……. 그 여름 남자는 나의 여름이 되었고 나의 여름은 언제나 그 남자와 함께 오곤 했었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계절이라면 단연 가을이나 겨울이라고 나는 단정하고 있었다. 왜 있잖은가. 잘난척하는 당당한 대학시절 누군가가 어느 계절이 좋으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 때는 무드 있게 표정관리까지 하면서“가을요”하거나“역시 계절은 겨울이지요”라고 했다. 그 래야 장차 시인이 될 것이고 가을이나 겨울이야말로 시적인 계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 량하고 고독하고 쓰라리고 고통을 이겨야하는 극복정신이 고이므로 문학은 탄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떻게 여름에 시가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 나에게 그는 여름 이 인간의 정신과 몸이 절정에 다다를 수 있는 은유의 큰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 다. 내 것인데 모르고 있는 내적의 힘. 생명의 왕성함이야말로 고독한 것이라는 것을……. 그 것이 아주 짧은 시간에 붙잡을 수 없이 우리 곁을 떠나가고 만다는 것을……. 그것을 알기 위 해 여름은 무성무성 살 필요가 있다. 바로 여름은 열정의 시기다. 여름이 온몸의 구석구석 잠 자고 있는 의욕을 왕왕 불러 일으켜 새 생명의 열정으로 불을 지르는 일이야 말로 여름과제인 지 모른다.
그 남자는 내게 여름을 알게 했다. 그 여름을 선 물로 주어 사계절을 사랑하게 만든 사람이다. 여 름엔 모든 가식과 인공적인 것을 떠나 자연인이 되고 그 자연인은 여름 산에서 곧잘 이루어진다 는 것을 강조한 사람. 사람을 벗고 쑥과 마늘을 먹는 곰이 되어 다시 영웅으로 태어나고 싶은 꿈 을 지니는 것도 여름이다. 기적이라는 말을, 인 간의 정신적 용량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사람. 그는 여름 산새처럼 자유롭고 여름 잎새처럼 넉 넉히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여름은 가고 다시 여름이 오고 그렇게 우 리들의 꿈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나 늘 여름이 면 그와 함께 산을 오른다. 진달래가 핀 산에 드 러누워 봄 하늘을 보면서 그 하늘은 금방 작열하 는 태양을 내리는 여름 하늘로 이어진다. 우리는 언제나 여름이라고, 여름의 바람이라고, 여름의 나무라고, 여름의 산새라고 믿고 싶은 것은 아직 그가 내게 건네 준 산나리 한 송이가 몇 십 년이 가도 시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안아 들이고 받아들이는 계절, 나 는 그 여름을 내가 꿈꾸는 여름 남자의 은유로 오늘도 안아 들이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그 남 자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여름 안에서 늘 소년이 며 청춘이다. 그 남자가 바로 당신이다.